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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순간은 영원하다. 영원 속에 묻혀 사라진다. 그 때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지금’이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시공간 또는 지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순간을 일체의 과거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을 갖지 않는 현재적인 것 영원과 시간이 서로 접촉하는 이의적(二義的)인 것으로 파악한다.     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의 ‘카이로스’는 ‘기회(찬스)를 의미하는 남자신의 이름이다. 카이로스신은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가 벗겨진 미소년인데 앞머리 밖에 없는 것은 좋은 기회는 빨리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왁자지끌 성대했던 행사 마치고 서둘러 밤 비행기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영원한 집두꺼비다. 못난 얼굴로 천천히 내멋대로 돌아다녀도 기죽고 밟힐 일 없고,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살 수 있는 내 집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     언제부터인가 타인과 어울려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시간이 살아 온 시간보다 적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며 살기로 한다. 타인의 방에 세 들어 살듯 부대끼지 않고 숙연하게 홀로 사는 방법을 깨우친다.   집 비운 사이 병풍을 두른 듯 아름드리 선 나무들이 하나 둘 가을옷을 입기 시작한다. 물이 마른 연못에서 갈대 서걱이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온다. 오리들은 어디서 물놀이를 하나. 무리 지어 아름답던 코스모스는 모가지를 꺾고 까맣게 익은 씨앗을 머리에 이고 봄을 기다린다. 몇 주 전에 뿌린 월동춘재, 청두무, 적색갓, 뿌리배추, 엇갈이 등 가을 채소는 며칠 못 본 사이 손바닥만큼 자랐다.     세월이 시계바늘 멈추고 천지가 얼어붙는 계절의 끝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자연 속에 티끌만한 존재로 태어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얼마나 바둥대며 살았던가.     꽃이 피는 때와 꽃이 지는 시간이 있다. 정상에 올라 성취감에 젖어 욕망과 교만에 심취돼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빛나고 화려한 잔치판을 벌리곤 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갈구하는 영혼의 풍금소리를 바람에 날려보내고, 귀에 익은 친근한 목소리, 명징한 언어들이 내뿜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생을 담금질하는 때가 있으면 묶인 손과 발의 족쇄를 풀고 퇴진하는 시간이 온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가장 적절한 시간이다. 멈춤과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이고 반전이다.     정역용은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유배생활을 하며 세속의 번거로움에서 벋어나 인공폭포수와 연못을 만들고 채소를 가꾸며 은자의 생활을 즐겼다.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 목민심서 경세유포 등의 명저를 담은 ‘어유당전서’ 500여권을 저술한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제목은 논어 자한편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에서 따왔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유배생활이든 귀향살이든 세속과의 번거로운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것은 새로운 모색과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홀로 지낸다는 것은 궁상맞은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추스리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이다. 버리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     순간이던 영원이던, 지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꿈꾼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행복 아닌가.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시간 시공간 소나무 측백나무 제주도 귀양시절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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